8/06/2011

窓門이 집의 영혼이었던 곳.. , Woodrow Homestead Coldwater Ontario



이사를 했다..



둘째 녀석의 학교의 학군을 옮기기 위해 소위 맹모삼천지교의 일환인 건데..
물리학을 해볼까 했던 녀석이 미술 계통으로 확~~ 진로를 바꾸는 바람에.. ㅎ



The Waltons


그런데.. 한국에서 부터 캐나다에서도 줄곧 아파트 생활을 해 왔었는데
이번에는 타운하우스라 불리는 일종의 연립주택으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다들 중국, 한국에 놀러간 틈을 타서..ㅎ

재미있는 건 새로 이사온 집의 구조가 아래 위 삼층이라는 거다.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지하까지 합치면 4층 구조인 건데..
천장에는 하늘을 향해 나 있는 작은 유리 창이 있어서 낮에는 구름이 떠가고 밤에는 별이 뜬다..

캐나다에서는 일반적으로 4,5 층의 타운 하우스들도 흔한 편이지만
내 입장에서 처음 경험하는 공간의 수직적 확장은 여러 모로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무자게 운동이 된다는 거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하루가 다르게 튼튼해져 간다.. ㅎ

9월 부터 대학생이 되는 큰 아이는 이제 집을 떠나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

집에서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학교까지는 20, 30 분 정도의 거리 밖에 안되지만
촌각을 다투어 학업에 매진해야만 하는 대학 생활이다 보니
공대 건물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기숙사에 배정이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큰아이는 물론이고 둘째인 사내 아이 역시
하늘과 좀 더 가까운 3층에 자리한 녀석들의 방을 좋아할 것이 분명한데,
다음 주에 돌아올 딸아이는 2주 남짓의 시간만 가지고는 집을 떠난다.
녀석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을 지..
계속 이어질 학업과 사회생활로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침 잠이 많은 딸아이를, 역시 아침 잠이 많은 아내를 대신해서 깨우는 즐거운 분주함이나
녀석을 학교에 데려다 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함은
이제 추억 속으로 묻히는 거다.. 인생이 그런 것이다.

어쨌든 이제 그 방은 guest room으로 쓰이게 될거다.
친지들이나 집사람 친구들, 혹은 내 친구들이 토론토에 놀러 오면 묶을 방으로 쓰이게 된다.

이전까지의 콘도(한국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날 방문한 친구들이 같은 층에서 방만 따로 쓰다 보니 서로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층이 달라지다 보니 그러한 불편함은 최소화 될거다.


앞 마당의 작은 공간에 앉아 '집' 이란 공간에 대해 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다가
예전에 써놓은 글이 생각이 났다.

'창문'은 집의 영혼..

또.. 그러한 영혼이 있는 집을 손수 지으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던
어느 캐나다 사나이가 생각났다.




Pierre Barouh.. Samba Saravan



창문은 집의 영혼이다.
Windows are the soul of a house.

프로방스를 여행하며 사진집을 발간했던 뉴욕의 어느 사진 작가 부부가 한 말이다..

창문을 좋아하던 내게 이말은 너무나 적절한 한마디였다.

창틀은 신형 알루미늄 섀시로 튼튼한지, 이중 창문에 겹유리인지, 통유리인지,
도무지 집의 영혼이라고 생각되기엔 너무나 기능적 요구사항에만 매달려 왔던
한국에서의 아파트 창문.. 또 이곳 캐나다 고층 콘도들에서의 창문..

독립주택의 경험이라곤 부친의 관사와 어렸을 적의 양옥집이 전부였고
결혼을 하고 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는 아파트 생활에서는
창문이 내 집의 영혼일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럼 영혼 없는 집에서 살아왔던 것인가?
아니.. 집이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해오고 있지 않았다는 게 옳겠다.

결혼 초엔 그저 몸 누일 공간이면 족했고..
이후엔 회사로의 접근성을 생각했었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이후론 학군을 생각했었고..
뭐 가끔 투자가치를 생각하기도 했고..

좌간.. 내가 살던 집이라는 공간은 살아있을 틈이 없었던 게다.


10월의 어느 바람 불어 좋은 날..

가을이 오면 Maple Road 라 불리우는 북쪽 길로 난 차를 몰았다.
캐나다에선 가을이 되면 마치 일기 예보를 하듯 단풍 예보를 한다.

.. 오늘 오전 8시 10분 까지는 바로 여기까지 단풍이 들겠습니다.. ㅎ

토론토를 벗어나 400번 고속도로의 북쪽을 서너 시간 이상을 차창을 열어 젖힌 채,
단풍의 색조와 향기를 맘껏 만끽하는 즐겁고 여유있는 드라이브였다.

무스코카에서 엘곤퀸으로 이어지는 휴양 리조트 지역까지 가고 싶었지만 여유를 너무 부린 탓인지
돌아올 시간을 따져보니 이쯤에서 U-turn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턴을 하기위해서는 작은 마을을 지나 다시 하이웨이 램프로 올라서야 했고
마을을 통과하던 중.. 무슨 박물관이라고 쓴 작은 간판을 지나게 된다.

끼~~익..!!

거의 아무도 지나지 않는 한적한 시골 마을 길에서 급정거를 하고는 뒤돌아 그 간판을 따라 들어서니,
평범한 한채의 집과 부속 창고들이 있는 저택이 나왔다.


그곳은 백수십년전 1800년대 초 즈음에 영국에서 부인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온
이주 정착민 아키발드 우드로우 와 그의 부인 캐서린이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곳이었다.



이 박물관 저택을 관리하는 젊잖은 신사가 집 안 곳곳을 안내하며 이야기를 해 줬다.
저택의 2층은 물론 정원의 농기계들과과 헛간들에 이르기까지 안팍을 샅샅이 내게 소개했다.

이후 난 상세한 소개의 글과 함께 이곳을 담은 사진들을 내 블로그에 올렸고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박한 유적지를 소개한 내게 감사를 표했고
이곳의 마을 신문에 내 소개가 올려지기도 했다.


이름하여 Coldwater Times.. ㅎ


한 마을과의 인연도 그렇게 예기치 않게 만들어 지곤 하는 것이다..ㅎ


반짝 반짝 윤이나는 마루 바닥의 거실에는 널찍한 식탁과 멋진 벽 난로가 인상적이었다.
벽 난로의 장작들은 벌써 보기 좋은 숯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서는 거실의 탁자를 비추고 있었고
오늘의 주인공 창문들을 이때 부터 눈여겨 보게 된다..

추억의 액자들에는 우드로우의 자손들이 걸어 놓았을 것 같은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드 여왕이 중심에 있었다.



아키발드 우드로우 일가가 방금까지도 살고 있었던 것 같이
식기 도구들과 일상 생활 도구들이 당시의 모습데로 놓여져 있었는데..

일년에 몇번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축제가 열릴때면
18세기 전통 옷차림을 한 아가씨들로 부터 당시 우드로우 일가가 쓰던 가재 도구 및 식사 용기들로
식사를 대접 받을 수도 있다 한다.

우드로우가 정착했을 1700년 대 말에는 이곳엔 사나운 추위와 짐승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죽 추웠으면 마을 이름도 Coldwater 라 했을까..

그는 통나무를 베어 작은 집을 지었고,
그가 사냥 해온 짐승들의 가죽으로 그의 아내는 가족들의 신발과 옷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날 때 마다 그는 한 칸씩 한 칸씩 집을 늘려 갔으며,
나중에는 지금과 같이 2층을 얹어 저택의 면모를 갖췄다 한다.
2층을 오르는 계단의 중간 쯤에는 그가 나무로 직접 만들었던 유모차와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다.


과거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의 독립에 맞서
미국보다 훨씬 추운 이곳에 정착민들을 보내면서 땅을 불하해 줄 당시,
이주민들이 가진 거라고는 신대륙에서의 개척 의지와 고작 이 지도가 전부 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반긴 것은 엄청난 추위와 쉴새없이 내리는 눈,
당연히 자신들의 영토를 수호하려는 aboriginal 어메리칸 인더언들의 도끼와 화살..
그리고 배곺은 사나운 곰들과 코요테들 이었을 것이다.


친절한 안내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성실하게 해 준 우리의 집사 아저씨는
코만 좀더 뭉특했으면 딱 칼 말덴 이다. ㅎ


이층 펜트하우스엔 간난 아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아름다운 창문이 있었다..


아키발드 우드로우..

그는 용감한 개척민으로써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굳건히 캐나다 변방의 한 지역을 개척한 사람도 아니요
무슨 대단한 리더십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었거나,
식민지 개척의 역사적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따뜻한 저택을 돌아 보면서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그가 매우 부러웠던 것은..

한 사나이로써,
아무것도 없는 이 모진 곳에 작은 통나무 집을 세우고 그 집을 늘려 나가며,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에서 부터 거의 모든 것을
부인과 함께 만들어가며 살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가족들의 존경을 받으며 오래 오래 잘 살았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실이 새삼 너무나도 훌륭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피터.. 너 역시 쁘티 브르주아 근성의 어쩔 수 없는 작은 인간이었구나..
라는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솔직히 난 그렇게 건강하고 성실하게
청교도 적 인생을 살다간 그가 몹시 부러웠다.


초기의 단순한 통나무 집에서 시작해 부인이 아이를 하나씩 가질 때 마다
그는 어떻게 방을 하나 더 만들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어딜 어떻게 늘려 집을 넓혀야 될가를 설계하고
필요한 재목을 직접 베어와 재단을 하며 뿌듯해 했을 아키발드..

해산이 가까워 오며, 새로 만든 방에 놓을 요람과 이부자리,
난방을 위한 스토브, 그리고 그 방의 창문까지 하나 하나 만들며 장만해 가는
아비로서의 그 심정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의 집 뒷 정원엔 아마도 그가 처음 집을 지으며 심었을 성 싶은 큰 고목이 서있었고
뒤로는 꽤 넓고 깊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



stay as a cool daddy as much
and as longer.. somehow..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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