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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2014

Once upon a time in Town.. 내 호텔의 그때 그 시절.., Woodlander Hotel Kamsack Winter Early 90's


오늘 고객 중 한 숙녀분이 사진을 세장 가져왔다. 올해로 세워진지 102년이 되는 내 호텔의 아주 오래전 사진들. 사진의 왼쪽 큰 건물이 지금의 내 호텔이다. 당시 일층에는 닥터 아무개의 클리닉도 있었고, 포커 룸도 있었고, 지금과 같이 바와 레스토랑이 있었다 한다. 하얗게 내린 눈을 배경으로 겨울 외투를 입은 신사 숙녀들이 타운의 메인 스트리트에 가득차 있는 사진.. 너무 마음에 들어 괜히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또 그 당시 호텔 앞 철길을 달리던 멋진 증기기관차의 사진들도 함께.. 집에 놓고 혼자 보는 것보다 내 호텔에 놓고 다른 이들과 함께 봤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이렇게 희귀한 사진 세장을 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10/11/2013

영화관의 추억..Train of Thought.. , COEX Seoul Korea Jul 21 2009



어렸을적 영화관은 내게 아주 컴컴한 곳으로 기억된다.
월하의 공동 묘지와 같은 머리긴 소복 귀신이 묘지를 반으로 가르며 나오는 영화가 많았고,
고등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곤 했던 벤허 풍의 소위 당시의 헐리웃 블록 버스터들도 있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일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서 본 야성의 엘자(Born Free)는 평생 기억에 남는다.
당시 영화를 몰입해 보시던 어머니의 옆 얼굴.. 너무나 인상적이라 잊을 수 없다.
애국가가 흐르면 모두가 일어나 애국심을 고취해야 했고, 흑백 대한 뉴스가 뒤를 이었었다.

영화관은 내가 살아본 여러 마을들에서 거의 제일 오래되다시피하고 아마도 가장 큰 건물이었을 텐데,
우중충한 회색빛 색조를 가진 그 거대한 건물의 전면엔 상영중인 영화를 선전하는 화려한 간판과 함께,
그 영화의 스틸 컷들을 십여장 붙여 놓은 영화 안내 보드가 설치되어 있곤 했다.
그리고 매표소인 소위 Box Office는 돈과 영화표를 교환하는 아주 작은 구멍 말고는 꽉 막혀 있었는데
돈을 넣으면 표를 내어주는 그 하얗고 이쁜 손의 주인공 얼굴이 어떠한지는 알길이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극장은 아주 화려한 곳이었을 것이다.
극장 자체가 드믈었음은 물론이고, 비디오 매체가 전무했던 라디오 전성기 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극장주는 큰 부자 축에 속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마을 마다 나름 내노라하는 토호 재산가들에 의해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극장이 들어서게 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호시절은 흑백 과 컬러 TV 시절을 지나며 극장 비지니스의 기세는 완전히 꺾여 이젠 마을의 가장 큰 건물 이라는 자리매김 이상을 넘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다시금 극장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영화관은 더 이상 어둡고 침침한, 그래서 內密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공간보다 밝고, 쾌적하며, 컬러풀 하게 고급화 되어 사람들을 압도하고 위축시킬 정도로 기세가 넘치는 곳이 되었다.
요즘 영화에서 추구하는 미장센이나 시나리오의 탄탄함에서는 이제 더 이상 촌스러움을 찾아 보기도 힘들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긴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예전이 그립기도 하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 한구석에 홀로 앉아 슬며시 연애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는 청년도 있었고,
가난한 연인들이 어깨를 기대면서 사랑을 소곤 거리기도 했고,
오징어 냄새, 맥주 냄새 솔솔 풍기며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에 박장대소하며 흥분하던 좀 정신나간 아저씨도 있었고..
시간을 때우러, 혹은 잠시 잠을 청하러 온 듯 동시영화 상영 내내 콜을 골며 자던 그리 밉지 않던 작업복 차림의 일꾼들도 있었고..


이곳 코엑스의 메가박스 시네마엔 많이도 왔다.
대치동 살때는 삼성동이 바로 코앞이라 주로 가족들과 왔었는데, 모든 해리포터 시리즈, 모든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다 이곳에서 봤다.

티켓 발매기가 있어 이제 길게 줄을 설 필요도 없고, 완전히 개방된 박스 오피스로 인해 희고 이쁜 손의 얼굴들은 고개를 들기만 하면 언제나 볼수도 있고..
극장내엔 떨어진 휴지도 없고, 큼지막한 관람석 의자들은 머리가 닿을 정도로 높아 불편이 없고,
생산자가 분명한 안전한 movie snack 들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고..

하지만 이러한 모든 편리함과 안전함과 쾌적함을 넘는 따뜻함, 뭔가 실소를 자아내게 하면서도 소위 인간적인 구석, 불량식품이지만 웬지 눈길이 자꾸 가는..
그러한 것들은 이제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지불한 비용 만큼의 댓가에 대한 더도 덜도 없는 서비스를 받으며 그만인 것이다.

토론토에서도 두가지 종류의 극장이 있었다.
삼성동 메가박스와 같은 복합 상영관인 Alliance Cinema 와 예술영화와 독립영화, 그리고 다큐멘타리들을 상영하던 Cumberland Cinema.
난 그 예술영화 전용관이 좋았었다. 자주 가다보니 영화관 스텦들하고도 인사를 하고 지냈고,
수요일 인가엔 거대한 팝콘과 커피가 무료로 제공되기도 하고, 오후에 좀 일찍가면 막 깍아주기도 하고..ㅎ
영화 자체에 대한 선호도도 있었지만, 그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과 그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감도 많이 작용했었던 거다.
하지만 Cumberland Cinema는 이제 토론토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토론토를 떠나올 즈음, 그곳은 건물을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문을 닫은 것이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였을텐데, 그 극장이 허물어 지고 초고층 콘도가 들어설 것이다.

서울의 인사동에 있는 아주 이쁘고 소담한 예술영화 전용관.. 하이퍼텍 나다.. 부디 오래 운영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영화관에서는 공간 자체, 그 공간을 움직이는 사람들 자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최대한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그 개방성이 주는 매력이 크지 않다.
공간의 기운이, 사람들의 손때가 느껴지기 힘들다.

영화가 끝나면 영화의 여운은 남지만, 그 영화를 상영했던 공간의 여운은 전혀 없는 차가운 세상이다.
마케팅의 외침만 가득한 욕심많은 공간이 되어버린 거다.


6/30/2013

追憶 the Way we were.., Cloudy Cloudy Lake Ontario & Downtown Toronto Oct 1 2009

Today..
I liked to be in the Distillery District for the galleries
sipping lovely espresso from the very old cafe of Balsac.
I liked to wander around the old market of Kensington
trying some of the oldest but best shops in town for vintage jeans,
quality cheese, fresh bread, and even live concert if I was lucky..
I liked to walk around the beautiful campus of
U of Toronto looking at the Victoria style buildings
fully covered by colorful leaves of ivy..
I liked to drink at the patio in the middle of Yorkville
smelling the sweet mood of refraining luxury in town..
...
...
But what I did was just watching the cloud..
the thick & closely layered clouds and clouds in the sky
carpeted far beyond the horizon while drinking some glasses of beer.

Bye now..
Bye today..




9/01/2011

일상의 나른한 평화.., 문산역 Korea

일상..

'반복적 일상'이라는 말이 가져다 주곤 했던 나른함 그리고 지루함의 이미지가
어느덧 안정스러움, 푸근함 이란 부드럽고도 긍정적 의미로 바뀔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내 인생에 있어 충분한 만큼의 세월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과 함께..
정치사회적 격변과 함께 어지러울 정도의 경제 성장 가도의 한켠에서 숨가쁘게 달려왔던 시절이
모두 마감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일 거다.



Wallace & Gromit Theme



여행에 대한 설렘을 배낭 가득히 지고서 열차를 기다리곤 하던 역..

bahnhof.. station..terminal.. 역.. 예끼..

처음 찾아가 보는 도시나 대륙에서의 호기심과 긴장감 넘치는 발걸음 속에서나,
자주 가던 도시를 다시 찾아 가는 느긋한 기대 속의 발걸음 속에서나,
어느 나라에서건 여행자로서 찾는 역은
'들어 오고, 빠져 나가고' 의 빠른 주기가 만들어 내는 역동성 자체가 하나의 즐길 거리가 되는데..

이러한 소도시의 작은 역에서는 가끔 나같은 나그네가 잠시 들려 갈 뿐,
평소에는 일상의 나른함 속에 들고 나는 동네 사람들이 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빤한 일상의 나른한 평화의 소중함 이라니..


아는 사람은 안다.. ㅎ


난, 나이 오십이 넘은 이제서 나마 그 소중한 가치를 품을 수 있게 됨에 깊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3/05/2011

유쾌한 병사 슈베이크.. The Good Soldier Švejk, Jaroslav Hašek 1923



아들 아이가 느닷없이 탐 클랜시의 잠수함 소설 'Red October' (The Hunt for Red October)를
읽겠다고 했고 녀석은 토론토 시내의 서점 'The World Largest Book Store' 에 재고가 있음을
알아 보고는 내게 사다 달라 했다.

1980년도에 쓰여진 탐 클랜시의 그 유명 소설은 이미 고전이 되어 일반 서점들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녀석이 사다 달라는 하드 커버의 양장본은 없었지만 페이퍼백을 발견해서 집어 들고는
이곳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점' 의 책들을 둘러 보는데..

오래전 익숙했던 그림의 표지와 함께 이 추억의 책이 내 눈에 띄었다.

아..이럴수가~~ !!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도 전인 아주 어렸을 적,
집에는 어머니가 즐겁게 보셨다는 독특한 표지의 책이 있었는데..

삽화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깨알같은 글자만 가득한 보통의 문학책들과는 달리
이책은 표지 부터 아주 독특한 스타일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챕터 마다 한 두 컷의 단순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들이 첨가되어 있었던 거다.

.. 유쾌한 병사 슈베이크..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함께
이 책의 장정에 대한 인상 깊었던 기억, 재미있었던 삽화들,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병사 슈베이크의 우스꽝스럽지만 순수한 말과 행동들..

그래서 아주 가끔 이 책이 생각났었고, 제대로 읽어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그 책이 내 눈이 띈거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고 집에서 아이들에게 아빠가 이책을 집어든 유래를 설명하고는 읽기 시작했다.

모든 이야기들이 당시 지배층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유머,마음이 아려오는 익살로 엮어지는 터라
큰 아이가 꼭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는 아빠가 다 읽고 나면 읽겠다 했다.

요즘 신화학(mythology) 강의를 듣느라 일리아드 와 오딧세이를 읽고는 매우 흥미있어 하는 딸 아이가
가능한 많은 종류의 인문 서적을 읽기 보기를 바라는 마음인거다.


체코 작가 야로스라브 하셱의 1923년 미완성 유고작인 유쾌한 병사 슈베이크는
자그마치 천사백만명의 전사자를 낸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슈베이크라는 지극히 선량하지만 지능이 많이 모자라게  묘사되는 한 시민을 통해 에피소드 형태로 그리고 있다.

당시 제국주의 하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어나는 군, 경찰, 법원, 군 의료진 및 비밀 경찰등
권력 기관들과 그 하수 기관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사회통제 방식과 부패상이 적나라 하게 묘사된다.

군 의료진에게서 '제대로 인증받은 멍청이' (certified idiot) 인 개 장수 슈베이크가
곡절 끝에 병사로 다시 군에 입대에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한편으로 정말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킬킬 거리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이 내게 정말 일어난 다면 난 어떻게 처신하게 될까..?
라고 자문하게도 되고, 슈베이크의 지극한 고지식함에 아련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황제의 초상화에 자꾸 파리똥이 슬어 지저분해 지자
맥주집 주인 이자 슈베이크의 친구인 팔리벡은 다락방 창고로 초상화를 치워버리는데..
이 사실을 유도 심문으로 알아낸 손님을 가장한 비밀경찰 브렛슈나이더는
그를 반역죄(treason)로 체포하고 법원은 팔리벡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 시민을 징집을 피하기 위한 꾀병이라고 판정하고
말을 할때까지 위세척과 관장을 반복하는 고문을 해댄다.

뭐 이런 식인데..

또한 당시 제국주의 시절 권력기관들의 터무니 없는 방자함과 부조리함 그리고 무능력,
개인에 대한 감시와 사찰 그리고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는 포학상들을 보면서 치를 떨게 되기도 한다.

제국주의 나 군국주의 형태의 전횡적 국가 형태에서
현재와 같은 자유민주국가로의 발전은 채 100년 도 되지 않는 것인데
우리의 할아버지들을 포함한 이전 세대들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중동의 대부분의 국가들이나
그보다 더한 아프리카의 국가들 그리고 말할것 없이 최악인 북한은
사실 저 당시 슈베이크와 그의 동료들이 겪었던 고초보다 더욱 잔혹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국가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개인이 수탈되고 황폐화되고 마구잡이로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언급되지만,개인에게서 '생각의 자유' 가 얼마나 소중한지..

하지만 그 생각의 자유 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나라가 아직도 많은 것이다.
사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도 슈베이크 시대 만큼이나 사복 비밀 경찰들이 어디에나 깔려 있었고,
저 시대에 황제를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대통령을 비롯한 체제 비판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다 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살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삼청교육대라는 전대 미문의 강제 갱생 수용소까지 존재했었던 한국.. 불과 수십년 전이다.

그 수가 날로 늘어나는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서는
수천만 반체제 소련인들을 죽음으로 내 몬 스탈린의 시베리아 수용소 들보다
더욱 반인륜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상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다.

캠퍼스 내에 학생수보다 사복 경찰들 소위 짭새들의 머릿수가 더 많았던 학창시절..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여기도 저기도 데모와 관련해 마포 경찰서에 조서를 쓰며
얼굴을 마주했던 형사들이라 서로 계면쩍게 쓴 웃음을 짓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면서
그러한 억압된 공포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치명적인 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소위 열사라고 불리우는 당시의 민주화 학도들은 제 목숨을 바쳐 정의의 이루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유쾌한 병사 슈베이크는 이러한 포악한 권력과
그 권력을 야비하게 휘두르는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대처가 여느 인간들 하고는 아주 달랐다.

이 인간이 진짜 모자라는 반푼이라서 이런 말을 지껄이는 건지..
아님 고도의 비아냥이 깔린 수사학의 대가 라서 이러는 건지..

독자인 나 역시 어떤 것이 진실인지 고개가 갸우뚱 하면서 읽게 된다. ㅎ



첵코에서는 슈베이크가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동상이 세워지고 우표가 발행되고, 티 셔츠에 그의 얼굴이 찍히고 그가 다녔던 단골 술집엔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한 사람의 정직하고 착한 바보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정치, 사회체제 상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이끌어 냈던 이 체코의 문학 작품은
저자 死後 삽화가들에 의한 독특한 삽화들과 함께 출간되어
사회 풍자 문학의 큰 족적을 남기며 유럽을 넘어 한국에 까지 소개되고 있었던 거다.



talk to you soon..

2/20/2011

장교의 방.., Fort York Bathurst and Front St. Toronto Jun 18 2009

요즘의 전쟁 영화처럼 소위 Cool 하거나 블록버스터 급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6.25 전쟁 당시의 전투 에피소드를 그려냈던 KBS 주말 연속극 전우.

극중 전투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
애수어린 그리고 어쩐지 좀 촌스럽기도 한 이 주제가 만큼은 기억이 생생하다.
가사가 정말 마음을 울렸었다.

대부대를 호령하는 지휘관도 아니고 직업군인으로 지원한 용병도 아닌..
그저 고향에 부모형제 다 놔두고 전쟁의 비극 속으로 뛰어 들 수 밖에 없었던 民草 병사들..

이 노래들 들으며 그들의 이미지를 그리다 보면 가슴이 막 미어진다.



구름이 간다.. 달도 흐른다
피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빗발치는 포탄도 연기처럼 헤치며
강건너 들을 질러 앞으로 간다..
무너진 고지위에태극기를 꽂으며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간다.
...




부친은 평생을 軍에서 보내셨다. 거의 40년 동안..

과거의 군인가족들은 참 먹을 것도 없었고.. 살곳도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언제나 전방의 다 스러져 가는 초가집 같은 곳에서 삯월세를 사셨다.
항상 연탄가스 중독에 어질어질 했고 같이 사는 집 주인의 사나운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부친이 대위 이셨을때 부대엔 주식인 쌀이 없어 감자로만 떼우신 적도 있으셨다.

하두 배가 고파 부식을 담당하는 선배 장교를 주먹으로 때리신 적도 있으셨다.. 으이구..ㅋ
마치 지금의 북한군처럼 헐벗었을 당시였다.

내 어린시절 부모님들은 그토록 온갖 고생을 하셨지만
그리고 곱게만 자라오신 어머니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항상 편찮으셨지만,
난 그 물좋고 산좋은 전방이 온통 다 놀이터였다.

눈깔사탕이라도 먹으려면 한참을 황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읍내로 나와야 가능했고.. 운이 좋을 경우 그 맛있는 짜장면 맛을 볼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은 어린 내게 풍성한 간식거리를 언제나 제공해 줬는데
냇가에서 어항으로 잡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피라미들..
가을에 곡식이 익을때면 논에는 수많은 메뚜기들이 온 사방으로 날라다녔다.

주전자에 가득 잡아온 메뚜기들을 소금을 좀 치고 연탄 불위에 올려 놓고 익혀 먹으면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가끔 산으로 올라 계곡으로 들어가면조그만 돌들을 들칠때마다 가재가 있었다.
역시 주전자 가득 잡아온 가재를 끓이면 빨갛게 변했고 통채로 씹어먹으면 그렇게 맛있었다.
Red Lobster 였던 것이다. ㅋ

어린아이들이라 어른들이 캐오는 것처럼 거대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산에 가면 칡을 캐먹을 수 있었다.
당시의 향긋한 미국산 쥬시후레쉬 껌 만큼 cool 하진 않았지만..ㅎ..
달작지근 맛이 참 좋았는데.. 지금 보면 굉장한 건강식인 거다.

특히 이런 자연이 주는 건강한 간식을 먹기 위해서는 온갖 군데를 다 뛰어 돌아 다녀야 하니
신체발달 과정에 있었던 나로선 이보다 좋은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어린 내가 섭취해야할 단백질, 칼슘, 미네랄 그리고 각종 비타민들은
온통 주변의 소박한 자연 속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온세상이 눈으로 가득 덮힌 삭풍의 겨울에도 먹을 게 풍성했다.
그건 콩이었는데, 잘 익은 콩이 덩쿨채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들을 꺽어 불을 피우면
금새 몸이 따뜻해 지면서, 마른 콩 껍질이 까맣게 탄다. 그걸 까면 김이 모락 모락 나면서 예쁘게 익어있는
뜨끈한 콩들이 나오는 것이다.  얼어터지는 손발을 종종 거리며 그 김나는 콩들을 까먹는 맛은 정말 좋았다.
그러고 나면 입주변은 물론 얼굴 구석 구석이 검댕으로 시커멓게 변하는데 그런 모습 역시 즐거웠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보면.. 뭔가 맛있는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바로.. 불을 피우면서 위에다 대충 막 던져 올려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감자들이다..
화들짝.. 녀석들을 불타다 만 막대기로 끄집어내고선 그 까맣게 탄 두툼한 껍질을 젖히면..
와....!!! 그 향기하며.. 그 뽀송거리는 전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맛이다.

중국의 어느 남방민족 요리집으로 초대받아 가서 애피타이저라고 나온 전갈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곤충 튀김, 서울의 어느 룸 사롱에서 고급 안주라고 나온 메뚜기 튀김,
어느 나라에 가던지, 스테이크를 오더 할때면 매번 같이 시키던 구운 감자..
그런데.. 어릴적 춥고 배고팠던 당시 먹었던 그 때 그맛을 도저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거다.. ㅎ

초등학교 4학년 말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죽~ 서울생활을 했지만
그 전엔 초등학교만 세곳을 다니며 부친과 전방 생활을 했었는데
어머니과 간호 장교들을 제외하면 온통 남자들이었고 동생 역시 남자였던지라
남성 위주의 공동체.. 특히 군이라는 특수목적집단에서 난 유년 및 소년시절을 보낸 게 된다.




2차 대전 때의 분대전투의 실상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린 1960년대 인기 전쟁 드라마.. 전투..

어렸을적 거의 한주도 빼지 않고 흑백 TV로 시청하곤 했는데..
당시 거의 찾기 힘들었던.. 그래픽으로 처리된 총검과 시그널 음악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부친은 간혹 시간이 되실때 같이 시청하시곤 했는데,
전투의 실상에 대해 배울게 많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


내가 다들 아저씨라 불렀던 그 군인들이 난 참 좋았다.
신체 건강하고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며 절도가 있었던 그 '군인' 이라는 존재감이
내 속 깊이 자리잡게 되는데,  그건 사실 부친을 가까이서 대하며 느끼는 절대적 존경심,
절대적 포스.. 뭐 그런 거였던 것 같다.

부친은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 초기까지도
위인전에 나오는 어느 위인들 보다 내게 절대적인 정신적, 신체적 그리고 지식적 지주셨다.

월남전에 한국의 정규군이 파병되기전 야전병원인 비둘기 부대의 경비 소대장으로 파월되셔서
한국군 사상 베트콩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고 몇주간 외신들과 인터뷰를 즐기시기도 했다.

미국의 포트 베닝스에서 실시되는 전세계에서 가장 힘들고 혹독하다는 레인져 특수전 훈련까지
이수하시고 한국의 공수부대와 유격훈련의 인프라를 닦으신 전형적인 무골의 군인 이셨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에서 특수부대 출신 말론 브란도가 이수했다고 열거되는 바로 그 훈련이다.

난 부친 보다 잘하는 것이 대학 시절 전공한 물리나 수학을 제외하곤 하나도 없었다.

아버진 나보다 모든 게 뛰어나셨는데.. 지금도 그러시다.
수십년 전부터 싱글 핸디인 골프를 비롯해, 스피드 스케이트, 수영, 사냥, 천렵, 수상스키, 스키...
장군이 되셔서까지 수송기나 치누크헬기에서 혹은 작은 UH-1H 헬기 문 앞에 걸터 앉으시고는
낙하산을 메고 점프를 하시곤 했다. 난 간혹 부친의 그런 실제 훈련 모습을 가까이에서 뵙곤 했는데,
내가 괜히 흥분해서 힘이 솟아오르곤 했다.

난 낙하산은 아예 매보지고 못했고, 골프 싱글은 아직도 요원하다.
수영, 스키, 스케이트, 사격.. 모든 걸 부친께 배웠었다.

.....

난 군인이 되었어야 한다.
.. 젠장.. 그런데 난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그런 날 발견한 거다.



A Tribute to "Combat"





토론토에 타운이 형성되고 여왕을 주축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영국군과 왕당파 커내디언 민병대들은
온타리오 호수를 통해 상륙하려는 미국의 양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도시 방위를 위한
요새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둘러본 요크 요새 (Fort York)이다. 

우리나라의 대대급 규모가 운용될 수 있는 규모의 요새였는데 1800년 초,
즉 200여년 전에 축조된 것이다.
1812년 과 1813년 미육군과 해군 연합군이 요크 요새를 침공했는데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던
영국군은 대패하며 요새를 버리고 퇴각한다. 이때 화약고에 폭발 장치를 해놓아 수백여명의
양키 군대를 살상 시키게 된다.
이후 양키군들은 부근 요크 지역을 약탈하며 파괴와 방화를 일삼았는데,
1814년 재조직된 캐나다 유격대에 의해 격퇴되고 영국군과 캐나다 군은
오늘의 모습으로 요새를 재정비한다.



어쨓거나.. 통상적인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 요새에서 내 눈에 띄는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이곳 요새를 지휘했던 한 장교의 방이었다.. 



부친 생각이 많이 났다..
꽤나 멋지게.. 마치 전쟁과 평화에서나 나옴직한
귀족 출신 장교의 프라이드가 잔뜩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의 주변은 단촐하기 이를 때 없다.
침대와 간단한 세면 시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제복을 놓아 둘 옷장이 전부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있다면, 무자게 정갈하다는 거다.

지휘관들은 부관이나 당번들이 있어 항상 정리 정돈이 확실 하게 유지되지만
워낙 초급 장교때 부터 생활 습관이기 때문에.. 장교들의 주변은 항상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 나 바로 전장터로 나가면 돌아올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부친의 직책이 바뀔때 마다 주로 전방 주변이었던 관사를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그저 모두가 간단한 구조였다. 장식품이라야 진급때마다 선물을 받으시던 지휘봉 등이 고작이었다.

북한과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던 시절에는 뻑하면 비상이 걸렸다.
방학때나 주말에 내려가곤 하던 부친의 관사에서 잠을 자다보면, 이런 저런 소리가 들리고
부친은 벌써 군복으로 갈아 입으신 뒤, 권총을 차시면서..
.. 아빠 다녀올테니, 니들은 더 자라.. 하시곤 했다.
비상이 걸려 이른 새벽에 부대로 혹은 野地로 나가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럴때 부친의 뒷모습은 항상 당당하셨다. 언제나..  





품위, 절제, 희생, 건전함.. 조국.. 남성적 삶..
단도직입적임.. 결코 굴하지 않는다.. 항상 차려있는..

이러한 단어들은 언제나 날 뜨겁게 했었다.
닳고 닳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래도 날 뜨겁게 한다.

'조국' 이란 말은 참 오래도 잊고 있었는데..
남의 나라 조국이 애처럽다 보니 다시 떠올랐었다.
니카라구아의 엘리트 젊은이들 10여명을 데리고 프로젝트를 하면서
'너희들은 니들 조국에 도데체 뭐니??' 라는 식의 훈시를 허구 헌날 하다보니
다시금 날 뜨겁게 만드는 단어가 되었었다..

어쨓거나 저런 과격한 단어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내가
모나지 않고 두루 두루 잘 지내야 되는 큰 조직 생활을 잘 했을 리 없다.

부친을 닮아 그런지 난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아니었고..
명분이 없는 일은 손대기가 정말 싫었으나
스스로에 대한 명분이 서는 일은 지칠줄 모르고 했다.

직원들이나 고객들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할때
난 내가 마치 무슨 선동가 처럼 큰 제스처와 목소리로 강의를 해대는 날 발견하곤 했다.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 수록 좋았고.. 내가 말하는 내용에 압도 당하는 audience 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마치.. 나를 따르라! .. 라고 앞에서 소리 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어쨓거나, 난 조직 생활을 한 참 하고 나서야
내가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군인 체질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아무것도 돌이킬수 없는 불혹의 나이에 불혹은 커녕,

야.. 이거 참 재미없게 살았네.. 살아보니 이길이 아니었네..

... 맙소사..


dignity.. abstinence.. sacrifice.. soundness..
fatherland.. manhood..
straightforward..
.. never compromising..
.. always on..

those words which made me really really hot in blood..



I should have become a soldier..
a lonely solider.. responsible for the lives of his men
fighting against enemy to survive
for his community, for the mountrains and rivers to protect,
and for ideology to pursue if there is any..

However though..
I had only a chance of getting 6 months of military training
to become an entry-level officer in the army.
And as soon as I got the badges of insignia
on my shoulders to become a platoon leader,
I got discharged from the obligatory military service
since I passed the national exam substituting
3 years of service to only 6 months..
The opportunity was given only to the qualified students
of having master degree or higher.

At least I enjoyed much of the programs for the military training
which allowed me lot closer to the wild nature of human being
as a man.. only with his own flesh and discretion..
of course with the minimum set of weapons for survival.

Now I am just on my reflection of those tough unforgettable days as a man..

Over the night walking for 100km of distance
with all the heavy military gears on the back..
Roadside walking for returning to barrack in the midnight
watching movie-scene sort of shadows of my colleagues
walking in a long row under the headlights of 2 and half ton trucks..


Trajectory of red-orange color of the bullets in the night with M-60 machine gun..
with good feeling of recoiling for automatic fire..


Military orienteering under the full moon light..

picking up couple of apples from the trees in the local orchard..

what a fresh taste..
...
and incessant feeling of hunger..
and chilly, chilly and chilly.. everyday in the fall & winter..
I actually like the weird feelings that I had not been accustomed to.. by tha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