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11

부에나 비스타에 관한 짧은 보고서.., On 'The Buena Vista Social Club' Jan 23 2010



젊은 친구들이 부르는 랩 버전 'Chan Chan'.. 진짜 쿨하다!
Chan Chan 이 이렇게 소화되어 불려질 줄이야..


쿠바혁명 이후 쿠바가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지구촌에 끼친 심오하면서도
즐겁기만한 한 혁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이라는
쿠바의 문화 코드를 탄생시켰다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그 클럽과 아름다운 음악들은
그들의 조국에서 오래전부터 사랑 받아 왔던 것이었지만
그들의 음악이 세상에 알려져 전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시작하면서
부에나 비스타 소설 클럽 이란 이름은 이전의 한 클럽의 이름에서
이젠 쿠바 근대 음악, 즉 Afro-Cuban music 의 중심에 서있다.

동시에 그들의 따뜻하고 여유있고 음악을 사랑하는 국민적 정서까지 표상화시킨
하나의 브랜드를 넘어선 쿠바 문화의 심볼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게
과장스러울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이 되겠다.

이들의 앨범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구입해 듣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90년대 후반 쯤이아니었나 생각된다.
너무나 착하게 생긴 이브라임 페레가 하바나 시내의 한 골목길을 걷는 모습의
재킷 표지가 마음에 들었고 Buena Vista 의 어감도 좋았다.

구두를 닦던 노쇠한 은퇴 보컬리스트 페레는 아래 사진에서와 같이
평소대로의 산책길에 나섰다가 부에나 비스타 부활을 꿈꾸는 뮤지션이자 기획자인
곤잘레스를 만나게 되고 그의 운명은 동화속 전설의 주인공으로 단번에 바뀌게 된다.




사실 이러한 쿠바 음악을 접해본 적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처음 듣는 특이한 가락의쿠바 정서에 빠져들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일년에 겨우 한 두번 정도 듣는 수준의 언저리 팬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그들의 도큐멘터리 영화가 나오고,
나 또한 Central America 로의 출장이시작되면서 라틴 음악과 익숙하게 되고
그들의 음악에 끌리면서 들을수록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고
급기야 오늘과 같이 골수팬의 입장에서 이들 뮤지션 개개인의 면모까지
들여다 보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 갑자기 부에나 비스타 소설 클럽이라는 명칭에서부터 그들과 관련된
쿠바의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는데,
공신력있는 제대로 된 자료들은 미국의 PBS 방송에서
도큐 감독인 빔 벤더스의 사진 작품들과 함께 영화, 음악, 사진 그리고 뮤지션들의 biography는 물론
도큐 영화의 한 부분이었던 인터뷰 내용까지 알차게 제공되고 있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은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 있었던 춤과 음악 공연을 주로 하던 회원제 클럽으로,
1940년대의 뮤지션들이 클럽에서 서로 만나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음악활동을 하던 클럽이었다.




클럽이 문을 닫은지 거의 50년이 지난 지난 1990년대에 이곳 클럽 활동에 영감을 받은
쿠바의 뮤지션 후앙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와 미국의 기타 연주자 라이 쿠더(Ry Cooder)가
클럽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1940년대 당시 클럽에서 실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했던
은퇴한 쿠바의 정통 뮤지션들을 수배해 모아 앨범 작업을 하게되는데,
그 앨범이 바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Bueno Vista Social Club'이 되겠다.

그리고 앨범을 레코딩 했던 모든 멤버가 전원 참여하는 공연이
1998년 암스텔담에서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유튜브 등을 통하여 접하는
그들의 full scale 연주는 대부분 이 암스텔담 공연에서 촬영된 것들이다.

또한 이 당시 독일의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는 이 연주실황을 필름에 담았으며
바로 이어진 뉴욕의 카네기 홀 공연과 하바나에서의 뮤지션들과의 인터뷰등을 담아
도큐멘타리 영화를 만드는데 그 역시 'Buena Vista Social Club' 이다.




빔 벤더스의 영화는 한국에서도 상영되었고
아카데미 최우수 도큐멘터리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고,
유러피언 필름 어워드 에서 최우수 도큐멘터리 작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수많은 영화제에서 최고의 도큐멘터리 영화로 각광을 받게 된다.

이러한 앨범과 영화의 엄청난 성공은 쿠바의 민속 음악과 전반적 라틴 음악의 부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촉발시키게 되면서 이후 앨범 작업에 참여 했던 쿠바 뮤지션들은
솔로 앨범을 발매하거나 장르가 서로 다른 국제적인 스타 뮤지션들과의 공동 앨범 작업등을
통해 계속해서 팬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이란 명성은 이러한 앨범 작업과 연주활동에 있어서
쿠바의 음악적 황금기였던 1930년대에서 50년대 까지를 대표하는
음악적 유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2004년 빔 벤더스 감독은 부에나 비스타의 멤버 중 가장 개성이 강한 삐오 레이바를
출연시킨 무지카 꾸바노(Musica Cubano)란 영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도큐멘타리 영화의 후속 쯤이 되겠다.
영화를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많은 후편 영화들이 그러하듯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잠시 보여지는 영화의 clip 들에서는 쿠바의 많은 젊은 후배 가수들이 등장하고
쿠바의 스탠다드 음악인 Son 리듬을 탄 젊은 래퍼의 랩송이 멋들어지게 조화되는 등
부에나 비스타의 주 멤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계승 발전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 영화도 꼭 수배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낙천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살아있는 삐오 레이바 의 멋진 콧수염과
꽉문 시가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때문이다. ㅎ

컨서트 전 조율 작업중인 이브라임과 오마라

오마라 뽀르뜌온도(Omara Portuondo)

부에나 비스타에서 유일한 여성 보컬인 오마라 뽀르뜌온도(Omara Portuondo)의 집안은
로맨틱한 전설로 내려오고 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부유한 스패인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난 가문으로의 혼인이 예상되었지만
쿠바의 흑인 야구선수와 결혼을 하여 오마라를 낳게 된다.
그렇게 태어난 오마라는 하바나의 전설적 나이트클럽인 트로피카나의 무희로서
그녀의 쇼 비지니스를 향한 커리어가 시작하게 되는데,
1950년대 그녀의 자매들과 함께 Cuatro D'Aida 란 이름의 여성 4중창단을
결성해 활동하게 되며 무려 15년 동안 같은 멤버들로 큰 명성을 쌓게 된다.

오마라는 미국 재즈와 쿠바 음악의 로맨틱한 유산을 다 함께 사랑하여 초기에
냇 킹 콜 과도 작업을 했으며, 감성이 풍부했던 그녀는 '필링의 연인(fianceé of feeling)'
으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후 보컬의 멤버이자 그녀의 동생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 가지만 그녀는 쿠바에 남아
뛰어난 보컬리스트로서의 그녀의 재능을 수많은 유명 밴드들과의 공연을 통해,
또 여러 앨범을 발표함으로써 적극 발휘하게 된다.

오마라와 이브라임이 부르는 끼사스 끼사스 (Quizas Quizas)



곤잘레스와 함께 부에나 비스타의 부활을 추진하던 미국의 기타리스트 Ry Cooder는
부에나 프로젝트가 시작되기전 그녀를 한번 만났적이 있었다.
그리곤 그 이듬해 부에나 비스타의 전설적인 세션 앨범이 제작되고 있는
EGREM 스튜디오에서 우연히 앨범 레코딩을 하고 있는 오마라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때 그녀를 바로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이브라임 페레와 꼼빠이 세군도 와의 참으로 멋진 공동 음악 작업을 하게 한다.

부에나 비스타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그녀는 엄청나게 밀려드는 해외공연 일정을
소화해야 했는데 토론토에서도 몇번의 공연을 가졌고 2009년인 작년 초에도
토론토를 다녀갔다.

1950년 부터 많은 앨범을 발표해온 그녀는 2008년 그녀의 음악인생 60주년을 맞아
Gracias (감사해요) 란 제목의 앨범을 발표해 팬들의 변함없는 사랑에
지극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브라힘 페레(Ibrahim Ferrer)

쿠바의 Afro-Cuban(아프리칸 쿠바) 음악 장르인 쏜(Son: Sound)과 볼레로(Bolero) 보컬리스트인
이브라힘 페레는 동화같은 스토리로 전 세계 음악 시장에 등장하게 되는데..

1927년 산티아고의 한 댄스 클럽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산티아고에서의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그랬듯이 낮부터 밤까지 먹고살기 위해 뭐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50년에 들어서 그는 파쵸 알론소 밴드와 전설적인 베니 모레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었고
부에노 비스타와 세션을 가지기 시작한 즈음에 그는 다른 부에노 비스타의
올드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다 썩어가는 구 하바나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페레는 거의 은퇴한 상태로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위해 때로 구두를 닦기도 했었다.

이럴 즈음 부에나 비스타의 재조직 및 부활의 산파 역할을 했던
산후앙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에 눈에 띄게 되는데,
그건 페레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바나 거리를 조용히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그 이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쿠바의 현대 음악 역사의 가장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써
세계의 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음악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다.

시가를 문 Pio Leyva..

삐오 레이바(Pio Leyva)

삐오 레이바는 쿠바에서 잘 알려진 많은 스탠다드 쿠바 음악을 작곡했으며
쿠바의 모든 개성을 한몸에 지녔다고 지칭되던 인물로
1950년 RCA Victor에 전속된 이후 5개의 앨범을 발표하는 등
가장 뛰어난 즉흥 싱어로도 유명하다.

1953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 혁명군이 대통령궁으로 진격을 감행할 때,
그는 꼼빠이 세군도와 앨범 레코딩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총성들이
앨범에 같이 녹음될 수 있을거라 호언했다 한다.



2004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후편격인 영화 무지까 쿠바나(Musica Cubana)에 출연한
삐오 레이바가 후배들과 꼼빠이 세군도의 대표곡 Chan Chan 을 부르는 모습


내가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인 Candela.. 초 Candle 이란 뜻.

.. 뚤라가 어젯밤 침대 머리 맡의 촛불을 끄지 않고 잠이 들었네.
.. 집에 불이났어 불이야! 불이야! 어서 소방관을 불러.. 어서
.. 불이나 불.. 어서 소방관을 불러~

뭐 이런 가사의 노래를 아주 재미있게 부르는데
쿠바의 풍속이나 문화를 모르는 나로선 이런 내용이 왜 즐거운 지는 잘 모르겠으나
난 가사와 상관없이 노래가 너무 좋다. ㅎ


어려웠던 조국의 현실속에서도 오래 오래 음악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그들은
말년에 전세계 사람들로 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
세군도와 곤잘레스가 2003 년에 각 95세와 83세로, 페레가 2005년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부에나 비스타의 앨범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꼼빠이 세군도의 곡 Chan Chan.

암스텔담 연주 모습과 멤버들과의 세션을 위해 1998년의 하바나 시내를 지나는
모터사이클을 탄 미국의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

사이드카의 옆자리엔 탄 사람은 바로 라이 쿠더의 아들 요아킴 쿠더로
세션의 퍼커션니스트로 참여한다.

빔 벤더스가 영화 촬영을 위해 1998년 쿠바에 도착했을 당시 그가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디지털 카메라 두대와, 작은 DVD 카메라, 그리고 촬영감독이 쓰는 Steadicam 뿐이었다.

빔 벤더스는 우리에게도 잟 알려진 '파리, 텍사스'를 비롯 유수한 작품들을 만든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라이 쿠더가 '파리, 텍사스'를 위한 멋진 블르스 음악을
만들어냄으로써 두 사람의 직업적 관계는 한 층 깊어지게 되며,
부에나 비스타 도큐멘타리에서는 라이 쿠더가 직접 출연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저 사이드 카를 타고 하바나 해변도로를 달리는 장면은 명 장면 중에 명 장면인데..
아들인 요아킴이 그 작은 DVD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도 촬영하고 쿠바 거리를 촬영한 것이다.


참.. 父子가 정말 멋지게도 산다..

결국 나 같은 관광객들이나 들고 다니는 소형 DVD 카메라만으로
이런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


부에나 비스타의 위대한 맏형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의 본명은
프란시스코 레필라도(Francisco Repilado)였는데,
그의 멋진 저음과 거인 다운 풍모로 인해 꼼빠드레(Compadre, godfather, 대부)의 쿠바 슬랭인
Compay와 그의 멋진 저음을 의미하는Secound Voice라는 의미의
세군도(segundo: second)를 따 그는 Compay Segundo 라 불리게 된다.

그는 20세기의 대부분을 살았으며 90세의 나이에 21세기를 열며
그리고도 오래동안 그의 음악을 추구했었다.



그가 자라난 곳은 쿠바 동부의 주도로 쿠바의 민속 음악인 Son 의 본고장이었다.

그는 낮에는 담배농장에서 일하고 밤엔 사람들의 머리를 깍아주면서 생활 했는데,
15세에 첫 작곡을 하기시작한 그는 이미 기타와 트레스(tres) 그리고 클라리넷 연주자로도
유명했고 그가 고안한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20대와 30대에는 당대 최고 그룹들의 멤버로 연주활동을 했고,
40대에는 당시 명성이 높았던 Los Compadres란 듀엣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50대에는 그가 결성한 '콤빠이 세군도와 그의 친구들 (Compay Segundo and his Muchachos)'를 결성해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해왔었는데 이 그룹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부에나 비스타의 음악이 되겠다.



콤빠이 세군도는 그의 혁신적 음악과 쿠바의 전통 음악과의 융합을 추구했던 선구자였으며
오늘날 쿠바 현대 음악이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그 중심에 있는 뮤지션이다.



Chan Chan은 콤빠이 세군도의 대표곡으로
쿠바의 전통 음악 장르 중 대표적인 'Son'의 표준적 가락을 가진 대표적 노래이기도 하다.

읊조리듯이 불러지는 이 아름다운 노래는 사탕 수수 밭에서 등이 부러져라 일을 해야만
했던 쿠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시적 이미지(poetic images)들이 에로틱한 내용들과 함께
중첩되며 표현되고 있다.

De Alto Cedro voy para Marcan
Llego a Cueto, voy para Mayar

El cario que te tengo
No te lo puedo negar
Se me sale la babita
Yo no lo puedo evitar

Cuando Juanica y Chan Chan
En el mar cernan arena
Como sacuda el jibe
A Chan Chan le daba pena

Limpia el camino de paja
Que yo me quiero sentar
En aqul tronco que veo
Y as no puedo llegar

De alto Cedro voy para Marcan
Lleg a Cueto voy para Mayar

(English)

From Alto Cedro, I go to Marcan
I arrive in Cueto, and then I go towards Mayar.

The passion for you, that, I'm feeling,
I can no longer, deny,
It makes me seem to shake, all over,
Its not something, I, can hide

When juanita and, chan chan,
Lifted sand above the water,
Her bottom jiggled like guava jelly,
It made chan chan ache, all over

Clear these troubles from my path,
All I want is to, sit down,
On that tree trunk that, I see,
And so i will stay around

From Alto Cedro, I go to Marcan
I arrive in Cueto, and then I go towards Mayar.


쎄드로에서 마까네 까지 난 떠난다네
꾸에또에 도착한 난
다시 마야리로 다시 길을 떠나네..

너에 대한 내 사랑..
더 이상 아니라 할 수 없네.
날 온통 흔드는 널 향한 내 마음..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후아니까와 찬찬이
해변가에서 모래 장난을 할때
그녀의 그곳은 구아바 젤리처럼 흔들려..
찬찬은 마음이 아파와...

내 인생의 골치 아픈것들 다 치워버리고..
지금 보고 있는 저 나무 가지위에 앉아
그저 이곳에 머물고 싶을 뿐 인데..

쎄드로에서 마까네 까지 난 떠난다네
꾸에또에 도착한 난
다시 마야리로 다시 길을 떠나네..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

부에나 비스타의 암스텔담 컨서트에서 꼼빠이 세군도와 둘이 앉아 멋진 기타 연주와 함께
Chan Chan 을 같이 불렀던 엘리아데스 오초아는 기타리스트이자 싱어로서 6살 때 부터
그의 음악을 시작한다.

그는 산티아고의 음악 가정에서 자라났는데 틴에이져 시절 쿠바의 소위 언더그운드라
할수 있는 작은 술집들과 브로텔등에서 연주 활동을 하게되고,
1978년에는 1940년 이후 쿠바의 민속 음악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던 꾸아르떼또 빠트리아
(Cuarteto Patria) 그룹의 아성을 무너뜨리면서 그의 그룹이 쿠바 민속 음악의 최고봉에
서게 되며 해외를 돌며 컨서트를 하게 된다.

꼼빠이 세군도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또한 카우보이 모자를 항상 썼던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지방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 한다.




역시 모든 건 사람이었다.

좋은 음악의 중심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꿋꿋하고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겐 삶의 철학이 있었고 음악에 대한 재능과 애정이 넘쳤으며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이어온 전통이 있었고, 그들 삶의 애환과 희망이 녹아있는
장단과 리듬, 그리고 노랫말이 있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도 없이
그저 음악이 좋아 들어왔던 그들의 음악이었는데
이제 그 멋진 멤버들의 면면을 좀 알고 나니, 그들의 음악이 더욱 더 좋아진다.

그들은 갔어도 그들의 음악은 언제까지나 남아
오늘도 쿠바와 세계의 곳곳에서 후배들에 의해 연주되고 불려지고 있을 것이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내 친구, 쿠바 사람 라울이 
자신의 고향에 휴가를 다녀 오며 사다 준 앨범을 통해 알게 된 
쿠바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중 한사람 이었던 폴로 몬타녜즈.
서정적 멜로디가 매우 아름다웠다.



그는 쿠바 뿐 아니라 멕시코등 중남미 스패니쉬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몇년 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


한국에서도 여러 재즈 뮤지션들과 친분을 가져서 느낀 사실이지만
한 우물만 판 진짜 뮤지션들은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 순박하고 착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만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고달픈 현실에도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수줍음이 많았다.

꽤 유명세를 탔었던 퍼커션니스트 유복성 형님도 무대에서의 걸쭉한 입담과는 달리
사석에서는 조심스럽고 수줍음이 많았던 것 같았고,
한 카리스마 했던 피아니스트 신관웅 교수는 능글능글 하긴 했지만 젊잖고 말수가 적었다.

대단한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까지 하며 색소폰 세상을 주도하고 있는 이정식도
참 예의바르고 바른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중견 색소폰 연주자 김기철은 항상 그 멋진 웃음을 지으며
다정 다감한 성격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리고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했던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오로지 음악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치겠노라는 의기로 항상 가득 차 있곤 했다.

상해의 유서깊은 호텔 Peace 호텔에서 며칠 내내 만나본 Old Jazz Club 의 다섯 명 멤버들의
평균 나이는 85세 인가 그랬다.
가장 세니어한 트럼페터의 연세가 95세 였을거다.

트럼펫의 주둥이가 뜯어져 나가고
콘트라 베이스의 몸통이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고 터졌지만..
그리고 이젠 연로한 관계로 가끔 서로의 팀웍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도 나고 실수도 있었지만
난 그들의 연주를 몇칠 저녁 내내 감사히 즐겼고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그들의 손을 잡고선.. 제발 오래 오래 사시라.. 했다.

그 중국 할아버지 재즈 뮤지션들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투명할 정도로 얼굴 빛이 좋았고 시종일관 빳빳하게 목을 세우며 품위있게 연주를 했었다.

초기시대 재즈의 엄격함이 배여서 이겠다 싶었다.

그들 역시 나와의 인사와 짧은 사적 대화를 잠시 나눌때는 많이 수줍어 했고
예의 바른 몸가짐을 가췄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천수를 누리고 저 세상으로 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60년이 넘도록 동료로써 또 친구로써
인생을 함께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

자본주의의 인간 시장 원리에 따라
매일 매일 전쟁과 같은 치열함 속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잘 이해하기 힘든, 내 상식과는 매우 다른 소위 신선한 force 가 느껴졌었고..
이들이 꾸려가는 인생의 방식에 깊은 존경심이 솟았었다.




bye for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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